“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이 이루시고 세우시는 교회”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을 세웁니다.
목회 현장에서 성도들과 만나 대화할 때 교회의 문화에는 익숙한데, 복음의 핵심과 본질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를 보며 계속적 교육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죄사함, 천국, 영생, 거듭남과 같은 복음의 본질, 교회의 목적을 알게 될 때 신앙을 더 깊이 탐구하려는 구도자의 자세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 곁에, 예수님과 함께 하게 하여 말씀을 가까이에서 듣게 하셨고 말씀의 능력을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로 올리우신 후에는 보혜사 성령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이 기억나게 하사 깨닫게 하시고 인도하심으로 제자됨의 사명을 감당케 하셨습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예수님의 제자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지금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게 하시며 곁에서 이끄시고 인도하심을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도록 신앙의 훈련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건강한 성도가 되는 것이 ‘Being’(하나님 자녀됨의 정체성)이라고 한다면, 건강한 성도의 방향성은 항상 ‘Doing’(하나님 나라를 이룸)을 통해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즉 건강한 ‘Doing’을 하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자신의 ‘Being’을 돌아볼 수 있게 하는 목회프로그램을 제공하여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성령의 열매들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건강한 사역자로 서도록 치유와 회복을 위한 프로그램들을 제공해야 합니다.
다음세대를 위해 이런 비전을 세우며, 나아갑니다!
인간을 만드시고 세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은 변함이 없습니다.
교회는 빠르게 변하는 세계에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을 만나게 할 사명이 있습니다. 이것이 다음세대 사역의 핵심이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교회가 갖추어야 할 최우선은, 절대적 진리가 되시고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삶의 기준으로 삼도록 가르치고 익히게 해야 합니다.
다음은 끊임없이 하나님께 순종하고 자신을 내려놓고 헌신하는 ‘기도’, 그리고 삶에서 경험되어지는 하나님을 기쁨으로 전하는 ‘전도(선교)’가 그 마지막입니다.
창세로부터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롬 1:20).
특별히 영적으로 민감하고 자신의 삶의 방향과 가치를 세워가는 젊은이가 그 행실을 깨끗케 하고, 하나님 나라의 비전을 품은 자로 세워가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오직 말씀뿐입니다.
또한, 교회가 세상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 즉, 세상을 구원하는 유일한 도구 역시 말씀입니다. 젊은 세대에 맞게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여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가는 데 힘쓰겠습니다.
세상의 가치는 높은 자리에서 섬김을 받는 것이지만, 예수님은 스스로 종이 되어 섬기는 사랑을 보이셨습니다(요 13:14~15). 이것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표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인 모든 성도들이 온전한 사랑으로 하나 되어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견고히 세워가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모습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알게 되며, 나아가 교회공동체가 진심으로 세상을 섬기는 종의 모습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미 임한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비전 공동체입니다.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며 왕성하게 하나님 나라를 세워갈 다음 세대가 시대적 정신을 읽고 말씀으로 방향을 잡아 세상을 변화시키는 건전하고 균형잡힌 능력있는 인재로 자신을 훈련하도록 돕겠습니다.
12.06
신경윤 목사 부임하다(2021.7.25. 사임)
05.02
장로장립 : 차동혁 진희득 이영애 이호근
집사안수 : 유용식 박생국 김종열 황영성 이호범
권사안수 : 이청구 정애순 최상란 오경희 방군옥 권 순 이금자 홍영실 김 연 정옥희 박효녀 차재순
명예권사 : 이정주 윤종임
장로은퇴 : 김영희A
권사은퇴 : 한범순 박정순
11.14
김성훈 목사 부임하다 (2024.11.24 사임)
11.28
김진수 목사 부임하다(2022.12.18 사임)
12.28
김정주 목사 부임하다(현재)
12.25
집사은퇴 : 박만석
권사은퇴 : 이복형 박효녀
협동은퇴 : 정형진 김옥례
02.18
양승대 담임목사 부임하다
03.03
새벽예배 요일 변경 (월-금) -> (화-토)
05.26
수요찬양단을 아이네오 찬양단으로 명칭변경, 금요찬양단을 아이노스로 명칭 변경
11.17
양승대 목사 위임감사예배
12.29
심광일 목사 부임하다(현재)
협동장로은퇴 : 유기환
집사은퇴 : 우덕성 김종열
권사은퇴 : 김혜숙 남영신
협동권사은퇴 : 임덕란
01. 06
주일오후찬양예배를 주일3부예배로 명칭 변경하다
01. 08
수요기도회 1부(오전 11시) 신설하다
05. 18
오수빈 목사 부임하다(현재)
11.01
교하면 동패리 207-1를 개척교회 부지로 매입하다(300평)
11.26
강영진 목사 시무20주년 감사예배를 드리다
02.04
김선태 목사 부임하다
03.18
교하제일교회 기공예배를 드리다
05.13
심흥수 목사 교하제일교회 파송하다
06.03
교하제일교회 입당예배 드리다
09.15
집사장립 : 유기환 이용희 김대선 조성배
권사추대 : 이재순 최명숙 원수옥 신명희 이순금 김임권 권명분 김옥례 김봉자 정애순 이순주 박성순
명예권사추대 : 이영손 김귀순 최봉희
은퇴추대 : 차영환
권사은퇴추대 : 박옥희 김순덕
12.01
유철종 목사 부임하다(2006. 3. 19 사임)
08.10
강홍준 목사 부임하다(2012. 5. 28 사임)
12.04
강영진 목사 원로목사 추대 및 강홍준 목사 위임식
12.19
권사은퇴 : 장보실 기옥랑
12.18
권사은퇴 : 이운숙
04.26
김진호 목사 부임하다(2009. 12. 27 사임)
06.10
제 7기 파주아버지학교 본 교회에서 개설하다 (6/10/7/7)
06.25
100주년 기념 비전센타 준공 감사예배 드리다
03.17
교회창립 100주년 기념 및 임직 추대 은퇴식 거행하다
장로장립 : 문갑수
집사장립 : 조증현 이상훈 박만석 이관재 윤대지 김남열 박길호 이춘무 김영만 이호근
권사추대 : 서순이 조성심 백선미 장윤자 박향원 손증경 이영애 김춘남 신점선 독고명숙 이 옥 윤주신 조혜진 박영숙A 김봉 최명숙B 박정순
명예권사추대 : 권춘자 박옥례 신복순 신정순 윤수현 전임선 최기화 최두옥 한기순
장로은퇴 : 정행직
집사은퇴 : 황선찬
협동집사은퇴 : 우종하
권사은퇴 : 피월순 김정자 김정희 신갑순 이선자 장정희 박성순
협동권사은퇴 : 염문자 조명순 허옥란
01.04
이성학 전도사 부임하다(2011. 2. 27 사임)
01.04
문영미 목사 부임하다(2011. 12. 31 사임)
03.21
교회창립 103주년 기념 및 임직·추대식 거행하다
장로장립 : 김영희 유기환
권사임직 : 남영신 노종식 복옥희 이미숙 이정옥 최상란
명예권사추대 : 권영순 김순형 이성실 이순희 황용숙
03.27
조민석 목사 부임하다(2012. 10. 28 사임)
07.15
교회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 금촌교회”로 변경하다
09.16
오성민 목사 부임하다(2023. 12. 17 사임)
10.14
김현철 전도사 부임하다
12.30
엘림카페 오픈하다
02.24
한영이 전도사 부임하다(2014. 6. 8 사임)
09.08
장로장립 : 백승욱
집사안수 : 배석만 심상표 신승한 진희득 이귀영 임병윤 우덕성
권사안수 : 강정애 최미숙 오상희 신경자 안병혜 김희선 김진희 박미선 김미영 한범순 조옥연 김혜숙 홍정순 육남숙 고연옥
12.08
집사은퇴 : 이상훈 이병희
권사은퇴 : 김봉 김임권 서순이 김영자 서홍자
12.21
이권일 전도사 부임하다(2017.10.31 - 목사안수, 11.12 - 사임)
집사은퇴 : 신공호
권사은퇴 : 김은희
12.20
권사은퇴 : 박영숙A
11.20
장로장립 : 이삼훈
집사안수 : 전종철 김태성 민동문 차동혁 염창섭
권사안수 : 이경애 예수재 신미나 한성화 고영숙 박기순 오복순
명예권사추대 : 한옥순 조음전
장로은퇴 : 조중택
집사은퇴 : 곽성군
권사은퇴 : 신장순 황해순 조성심
11.27
진재승 전도사 부임하다(2017.10.31-목사안수, 2018.12.23 사임)
12.03
장광석 전도사 부임하다(2018.10.28 사임)
12.31
집사은퇴 : 정상옥 임병윤
권사은퇴 : 안경숙 허영숙
11.11
양승대 목사 부임하다(2020.11.29 사임)
11.11
장로장립 : 전종철
집사안수 : 최성규 노승윤 배인철 김병현 박영민
권사안수 : 송신숙 한의순 진영애 김경란 김인숙
명예권사 : 이희옥
권사은퇴 : 이순복 전양재
12.23
박승현 전도사 부임하다(2019.11.10 사임)
12.08
이동근 목사 부임하다(2021.11.28. 사임)
12.29
권사은퇴 : 정순옥 조옥연
03.15
언더우드 선교사가 개척하고 이원긍, 신태영씨를 중심으로 금촌3리(새마을)에서 초가 4간을 예배처로 삼은 것이 본교회의 시작이다
한 마리아(여)씨가 파주지역 순회전도사로 시무하다
위 교회당을 헐어 금촌1리에 이전하여 초가 6간 예배당을 건축하다
차경성 전도사가 금촌, 갈현, 대동, 문산, 광탄, 대원교회를 순회시무하다
이종수영수 장립하다
조승도 전도사 시무하다
최의열 전도사 시무하다
정호림 전도사 시무하다
장로장립 : 남천용
권사추대 : 오남하
강병천 전도사 시무하다
김흥식 목사 시무하다
김준곤 전도사 시무하다
차경성 목사 시무하다
01. 25
금촌2리 334번지 407평 대지위에 54평 성전건축하고 헌당예배드리다(현 유치원건물)
05. 07
장로장립 : 이면호
07. 20
장로장립 : 김백열
01. 30
유년주일학교 제1회 졸업예배드리다
정효근 목사 시무하다
04. 15
한영식 목사 시무하다
05.
정효근 목사 시무하다
07. 01
윤성대 목사 시무하다
01. 06
권사추대 : 남태희 홍경희
05.
박봉옥 목사 시무하다
05.
최대석 목사 시무하다
12. 14
장로장립 : 박병승
집사장립 : 김봉근 고현희
권사추대 : 권기선
11. 05
추진규 목사 시무하다
10. 04
김형직 목사 시무하다
11. 03
강영진 목사 부임하다
03. 21
강영진 목사 위임식 거행하다
장로장립 : 고현희 유태한
집사장립 : 이도상 백두현
권사추대 : 유옥희 이운숙 이상현 최재순 문홍희 안경희 이덕구 신순임 이순례
권사은퇴 : 남태희 이정순
10. 09
집사장립 : 전옥빈 장진환 김연복
권사추대 : 최정문 박옥희 인영석 이정자
03.
남선교회를 조직하여 구역모임 및 선교활동을 시작하다
10. 13
금촌2리 334번지 현위치에 연건평 303평 규모의 7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새 성전을 준공하다
11. 27
장로장립 : 전옥빈 백두현 장진환 김연복
집사장립 : 강동영 정행직 이상훈 조중택 박만석 신은철
권사추대 : 박찬자 김순덕 최경숙 신춘심
12. 25
공병훈 전도사 부임하다
명예권사추대 : 심상숙 서순덕
04.
찬양을 통한 파주지역 선교활동을 목적으로 루아찬양선교단을 창단하다
10. 01
김성진 전도사 부임 (91년 봄노회시 목사안수받다)
02. 25
해외선교회를 조직하여 선교후원활동을 시작하다
03. 18
원로장로추대 : 김백렬
집사장립 : 이도상 이용종 김상규
권사추대 : 피월순 현희순 김은희
명예권사추대 : 조화순 고분례 박복례 이미자
07. 08
예수초정 큰잔치를 통해 3200여명이 교회를 다녀가다
10. 27
박명석 목사 부임하다
01. 30
김인옥 전도사 부임하다
01. 10
강신란 전도사 부임하다
05. 30
장로은퇴 : 박병승
장로장립 : 정행직
집사장립 : 이선청 조기남 이상근 곽성희 이명철 조증현
권사추대 : 이강숙 장보실 민병훈 최춘희 허영숙
11. 10
심흥수 목사 부임하다
05. 26
장로장립 : 김상규 이명철 조중택
집사장립 : 강기수 곽성군 김동원 문갑수 박철웅 백승욱 백원 이병희 이삼훈 전수만 정상옥 홍진수
권사추대 : 기옥랑 김영자 김정자 김정희 김혜순 신갑순 신장순 이선자 이순복 전양재 정순옥 황해순
은퇴권사추대 : 문홍희
03. 13
금촌경로 대학을 개교하다
10. 19
강완주 전도사 부임하다
12. 14
장로장립 : 신은철
집사장립 : 차영환 황선찬 이병국 신공호 박정호
권사추대 : 장정희 안경숙 정충교 전금순 김영희 이복형
명예권사추대 : 길경애 정순욱 최영실 백남선
은퇴권사추대 : 권기선
12. 06
교회 인터넷 홈페이지 개설하다(http://kcpc.or.kr)
03. 21
전옥빈 장로 은퇴하다
12. 19
김중권 전도사 부임하다
회복과 치유가 있는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달려갑니다!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그들이 에돔의 남은 자와 내 이름으로 일컫는 만국을 기업으로 얻게하리라 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아모스 9:11~12)
목표가 무엇이냐에 따라 인생의 방향이 결정됩니다.
누군가가, 토끼가 거북이에게 패한 것은 토끼의 목표는 거북이였고,
거북이의 목표는 산꼭대기여서 거북이가 이길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거북이만 이기면 된다고 하는 생각이 토끼를 게으르게 만들었고,
산꼭대기까지 가야 한다는 분명한 목표가 거북이를 열심히 달려가도록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분명한 목표는 올바른 방향과 일정한 속도를 결정짓게 합니다. 우리 금촌교회는 말씀과 기도, 전도의 삶이 일상이 되어 성령 하나님의 회복과 치유가 있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데 모든 성도가 연합하는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하나님이 은혜 주시면 비록 더딜지라도
우리를 온전케 하시는 은혜를 누리게 하실 줄 믿고 기대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지날수록 더 깊어 가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싶습니다.
은혜의 강가로 나오셔서, 우리 주님이 주시는 생수를 함께 마시기를 원합니다.
담당사역 : 1교구, 행정, 안수집사회,
여전도회, 새가족부, 아동부
담당사역 : 2교구, 방송, 권사회, 찬양(찬양위원회),
남선교회, 교육부 총괄, 청년부
담당사역 : 예배, 음악, 교육
담당사역 : 재정, 미래준비
담당사역 : 선교, 사회봉사
담당사역 : 관리, 역사보존
담당사역 : 사무, 관리
3부예배 - 주일 오후 1시 40분 / 본당 2층 예배실
1부 - 수요일 오전 11시 / 본당 2층 예배실
2부 - 수요일 저녁 7시 30분 / 본당 2층 예배실
금요일 저녁 8시 / 본당 2층 예배실
월-목 저녁 8시 / 본당 1층 예배실
토요일 오전 10시 / 본당 1층 예배실
화~금 새벽 5시, 토 새벽 6시 / 본당 2층 예배실
집회 | 시간 | 장소 | |
---|---|---|---|
유치부 예배 | 주일 | 오전 11:00 | 비전센터 2층 |
아동부 예배 | 주일 | 오전 11:00 | 비전센터 3층 |
청소년 예배 | 주일 | 오전 11:00 | 본당 1층 예배실 |
청년부 예배 | 주일 | 오후 1:40 | 본당 2층 예배실 |
주소 : (우)10928 경기도 파주시 금촌동 평화로 50 (지번 : 금촌동 334-117)
전화 : 031-944-8877, 031-941-8877
팩스 : 031-944-1396
3F
새가족부실, 재정부실, 방송실
2F
본당, 자모실
1F
식당, 예배실, 엘림카페
5F
사택, 게스트 룸
4F
사택
3F
목양실, 예배실, 청년부실, 청소년부실, 아동부실
2F
교육자 사무실, 예배실, 유치부 교사실
1F
주차장, 탁구장
금촌교회를 찾아주신 여러분을 주님의이름으로 환영합니다!
등록을 원하시는 분들은 주일 새가족부원 또는 비전센터 2층 교역자실에 오셔서 도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본당 입구에 있는 안내위원이나 교역자를 통해서 필요한 모든 도움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새가족 등록실에서 간단한 등록절차 (등록카드 작성, 사진촬영)를 진행합니다.
등록카드를 작성하신 후 1층 새가족실에서 담임 목사님과 만나 기념촬영을 하시게 됩니다.
새가족 교육은 4주 과정이며, 기본신앙 교육 및 교회소개, 자기소개와 나눔을 통하여 카야교회에 적응하며 교제합니다.
4주의 기본과정 교육을 반드시 이수해야 정식으로 본교회 교인이 되어 모든 양육과 모임, 봉사와 섬김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기본과정 이수 후, 체계적인 신앙생활을 원하는 새가족이나 처음으로 교회에 온 초신자는 6주의 양육과정을 통해 신앙교육(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신앙생활, 교회, 구원의 확신 등)을 받게 됩니다.
기존신자는 4주의 기본과정 이수 후, 초신자는 6주의 양육과정 이수 후 ‘구역’에 배정되게 됩니다.
본인이 주거하고 있는 구역에 배정되어, 금촌교회의 성도로서 교제하고 봉사하며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심방 요청시 담임목사나 부교역자들의 심방을 받을 수 있습니다.
미국 선교사(Horace Grant Underwood), 한국 이름은 원두우(元杜尤).
런던 출생으로 1872년 미국으로 이주, 뉴욕대학·뉴브런스윅신학교 졸업, 1884년 한국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로 선정되어 1885년 4월 5일 감리교 선교사 H.G. 아펜젤러와 함께 제물포로 입국했다. 1887년 한국 최초의 교회인 서울 새문안교회를 세웠다.
언더우드는 1859년 7월 1일 영국 런던에서 아버지 죤(John Underwood)과 어머니 엘리자벧(Elisabeth Grant Marie) 사이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죤은 믿음이 두터웠을 뿐만 아니라, 화공학 방면에 재주가 있어 인쇄용 잉크를 발명하였고 타자기와 묵지(리본), 안전지등을 발명하여 영국 왕실 예술원으로부터 메달과 표창을 받은 바 있었다. 언더우드의 형 죤(John T.Underwood) 역시 과학적 두뇌와 기업가적 재질이 있어 그의 사촌 아더와 세계적인 대규모 회사 설립에 천분을 발휘한 사람이었다. 언더우드의 생모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적으나 온유하고 인자한 성격을 가진 이로 여러 남매를 기르면서도 짜증을 내거니 큰소리를 지른 일이 한 번도 없었다고 전한다. 1865년 언더우드가 5세 때 생모의 작고로 아버지 죤은 얼마 뒤 재혼을 하였다. 그러므로 언더우드를 포함한 형제들은 계모 밑에서 성장해야 했다.
언더우드의 아버지는 주일이면 여러 어린 자녀들을 거느리고 교회에 가서 어린이 키대로 만든 의자에 앉혀 예배에 참석하게 하였으며, 집에 돌아와서는 큰 아들에게 설교에 관한 것이나, 성경에 대하여 배운 바를 말해 보도록 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再臨)을 믿고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 그리스도를 뵐 수 있기를 항상 바랬다. 언더우드는 형제들과의 정이 대단히 두터웠다. 이 형제들은 아버지의 지도 밑에서 일찍부터 성경 구절을 많이 외웠고, 어떤 때는 히브리어로 된 구절을 아버지 앞에 나가 외우기도 했다.
언더우드는 일에 몰두하면 다른 일들을 잊어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집안이나 몹시 가난하여 돈이 귀할 때 언더우드는 어느날 5달러 짜리 지폐를 갖고 식료품 상점에 심부름을 가게 되었다. 상점에 다다랐을 때 돈이 없음을 보고 놀랐다. 5달러가 온데간데없고 자기 손에 못쓰게 된 돈의 한 귀퉁이만 남아 있었다. 그는 길을 걸으면서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신없이 그 돈을 잘강잘강 찢어 못 쓰게 만들었던 것이다.이와 같은 이야기는 하나의 예이지만 그만큼 그는 일에 정신을 쏟아 만사를 잊어버리는 성격이었다.
그가 10세 되던 해에 한살 위인 형 프레드릭과 프랑스의 기숙 학교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언더우드는 져어지 시에 있는 헤스브룩 소년 학원에 입학하였다. 언더우드는 대단한 열의를 갖고 공부하였던 것이므로 대학 입학에 필요한 희랍어 과정을 불과 여섯 달만에 마칠 수 있었다.
그 후 언더우드는 17세 때인 1877년 뉴욕 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간지 2년뒤인 그는 아버지의 죽음을 맞게 된다.
언더우드는 대학 4년간의 평균 성적이 89점이었으며 특히 희랍어와 웅변의 성적이 언제나 좋은 편이었다. 그리고 삼각법, 분석 기하학, 천문학, 화학 등의 성적이 훌륭하였다. 이것은 뒷날 한국에 입국해 제중원에서 자연과학 계통의 과목을 가르치는데 도움이 되었다.
1881년 언더우드는 뉴욕 대학을 졸업하며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그해 가을 뉴 브런즈윅(New Brunswick)시에 있는 화란 개혁 신학교에 입학하였다.언더우드의 키는 별로 크지 않았다. 5피트 8-9인치(약173cm)정도였다. 어깨는 딱벌어지고, 짙은 밤색 곱슬머리로 뒤덮인 머리는 유난히 컸다. 얼굴은 잘 다듬어져 있으면서 강한 인상을 풍겼다. 코는 매부리처럼 굽어 있고 약간 크기는 했으나 눈에 뛸 정도는 아니었다. 입은 여자처럼 나약하지 않았고, 더욱 견고하고 강하였다. 눈은 맑고 흑갈색이었다. 이것은 성실함과 열정과 친절함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뉴 브런즈윅에서 3년간 체류하는 동안 언더우드는 학과목을 열심히 공부하는 한편으로 전도 사업에도 열을 올렸다. 신학교 교수들은 이에 대해 공부에 방해된다고 마땅치 않게 여겼으나, 언더우드는 이에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나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선교사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네살때였다. 인도에서 돌아온 어떤 사람의 얘기를 듣고 어린 마음에도 큰 감동을 받아 신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동시에 신학교를 졸업하자 당분간 의학도 공부하였다. 외국의 오지에 있는 선교부에서 일을 하려면 주민들에게 의료의 혜택을 베풀어야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1883년 여름과 다음해. 즉 신학교 마지막 해에 그는 뉴 저어지, 즉 폼턴(Pomton)에 있는 교회를 맡았다. 그는 교회에서 항상 행복한 편이었다. 가족처럼 대하였던 것이므로 늙은이나 젊은이 모두 그를 친구처럼 대했다. 월급을 배로 올려 줄 터이니 계속 목회를 맡아 달라고 요청이 있었으나 그는 거절하고 선교사로 외국에 나가기로 결심하였다.
1882년 동경 명치 학원에 있던 올드만스(Albert Oltmans)에게 언더우드는 복음을 받지 못한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처음에 그는 인도에 소명이 있는 줄로 믿었기 때문에 그리로 갈 생각으로 몇 가지를 특별히 준비해 놓고 1년간 의학 공부를 하였다. 한국에 가겠다는 사람도 쉬이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누구 한 사람도 선뜻 나서는 사람이 아직 없었고, 어느 교회도 손댈 눈치가 보이지 않았으며 교회를 대표하여 외국 선교 사업에 종사하는 지도자들까지도 역시 한국에 들어가는 것은 시기상조란 기사를 쓰고 있었다. 이 때 언더우드는 한국 선교에 대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택하심을 깨닫고 한국으로 갈 것을 결심하였다. 언더우드가 미국에서 떠나기 직전 한국에서는 갑신정변이 일어나 사회가 몹시 불안하였다. 그러므로 언더우드는 당장 한국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런데 미국 장로교 선교부로부터 파송된 선교사 알렌이 이미 한국에 들어가 있었고, 갑신정변 때에도 활약한 바 있어 언더우드의 앞날은 열려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일본에 머물면서 한국인 기독신자 이수정을 만나 한국어를 배웠다. 이수정은 [마가복음]을 한국어로 번역한 인물로써 그에게 한국어를 배웠다는 것은 매우 다행한 일이었다.
언더우드가 한국 제물포에 도착한 것은 1885년 4월 5일이었다. 이날은 부활주일이었다. 같은 배에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목사 부부가 타고 있었다. 그러나 부인은 임신으로 한국의 정세가 불안하므로 일본으로 되돌아가라는 충고를 받고 그들 부부는 나가사키로 돌아갔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불안을 무릅쓰고 상륙하여 4월 7일 서울로 들어왔다. 그는 독신이어서 행동하기가 편하였다.
언더우드가 서울에 들어온지 3일 뒤 '알렌'에 의해 병원이 설치되었다. 이 병원이 바로 광혜원(후에 제중원)이다. 언더우드는 약제사로 당장 병원에서 일을 시작하였다. 서울에는 외국인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적 시설이 전혀 없었다. 좁은 골목에다 비만 오면 거리가 진흙수렁 길이 되고 티부스, 홍역, 천연두 등의 전염병이 쉽게 감염될 수 있었으며 무당, 판수 등에 의한 미신이 판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여름에는 무덥고 몹시나 추워 외국인에게는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더우드는 낙원이라 생각하고 이러한 나라에 자기를 보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언더우드는 이에 일본에서 갖고 온 이수정 번역의 '마가복음'을 일반인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아펜젤러 목사와 함께 다시 번역하기 시작했다. 또한 말을 배우게 되면서 [영한사전]과 [한영사전]을 편찬하였다.
한국에 온 초기 선교사들은 여러 차례의 대립에 직면하게 된다.당시 선교사들의 나이가 모두 20대였고 이들 젊은 선교사들을 이끌어 나갈 인물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알렌과 헤론은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전도 방식을 택했지만, 언더우드는 아래로부터 위로 올라가는 전도 방식을 택하여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신자의 수가 급증하고 있었던 것이다.
언더우드가 한국에 들어온 그해 말, 그는 고아원 설립을 추진하여 당시 고아원에 별 관심이 없던 한국인에게 쉽게 허가를 얻어내었다. 언더우드는 고아원으로 만족하지 않고 장차 그것을 대학이나 신학교로 발전시킬 생각이었다.
언더우드는 30세가 되도록 독신으로 지내다가 1889년 3월 '릴리아스 호튼'양과 결혼하였다. 사실 언더우드는 본시 다른 여자와 약혼을 하였지만 그녀는 선교 사업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고 또 그의 포부에 대해서도 별로 존경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녀는 그와 파혼하고 말았다. 이런 일을 호튼양은 알고 있었다. 결혼할 때 그녀의 나이는 38세 따라서 언더우드보다 8세나 위였다. 그녀는 항상 성경을 읽고 기도를 올리고 빈민 구호 사업 같은 일에 정성을 바쳤을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기독교인답게 살았다. 시카고 여자 의과대학 수료 후 '에리 톰슨'병원에서 수련의로 근무하던 중 갑자기 북장로교 선교부로부터 한국에 가도록 요청을 받아 1888년 3월 23일 한국에 부임하게 되었다. 우선은 제중원 부인과 책임자가 되어 수많은 한국 여성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호튼양은 왕비의 시의까지 겸임하게 되어 자주 궁중을 출입하였다. 호튼양은 왕비와 가까워지게 되어 언더우드와 결혼할 때는 많은 선물을 받기도 했다. 결혼한 다음해에 아들 원한경을 낳았으나 병으로 몹시 고생하였다. 의사들이 기후가 좋은 곳에 요양할 것을 권고하자, 1891년 가을부터 마침 남편의 안식년에 해당되어 인도양을 거쳐서 제네바에 잠시 머물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요양하고 1893년 2월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 동안 언더우드는 주로 전도 여행을 하고 다녔다. 고아원 일은 밀러목사가 맡아 학교로서의 체제와 기구를 갖추고 이름을 '예수교학당' 혹은 '구세학당'이라고 고쳤다. 이 예수교 학당에서는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김규식, 도산 안창호 등이다. 그리고 여기 졸업생들이 중심이 되어 영신 학당을 세웠다가 뒤에 감리교와 연합으로 수창동에 협성학교를 세웠다. 1905년 봄에는 학교 이름을 경신(儆新-새로운 것을 깨우친다)으로 고쳤다.
처음 얼마간 미국 선교사들의 전도 활동은 병원과 학교에서 개인간의 사사로운 대화를 통하여 조용히 진행되었다. 한국 정부에서 기독교를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 종교로 인해 외국인이 침투하고 한국인의 전통 사상을 동요시킬 것 같고, 또 이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외국 세력을 끌여들여 난을 일으키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국 정부 관리들은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는 것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는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그러므로 선교사들은 관리들의 감정을 건드리지 않고 서서히 거리로 진출하였다.
갑신정변이 일어난 12월 4일 선교사 알렌을 찾아온 이가 있었다. 노도사(노춘경)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중국 문헌에 나오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기록에 관하여 호기심을 갖게 되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한문 번역본을 빌려 갔다. 알렌은 통역을 통해 만일 그 책을 읽는 것이 발각되면 목이 달아날 것이라는 주의를 주었다.그 후 1885년 알렌을 다시 찾아와 어학 선생 노릇을 하였다. 뒤에는 좀더 배우고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게로 갔다. 그는 언더우드로부터 얻은 [성당수위], [심령의 구원], [야소교 교리이지]등의 책을 통해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노도사에게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었다.
언더우드는 서울에 돌아와 서서히, 그리고 착실히 활동을 전개하여 1887년 9월 27일 정동에 있는 자기집 사랑방에 14명의 한국인 신자들과 같이 예배를 드렸다.언더우드가 한국에 입국한지 2년만에 교회까지 세울 수 있게 되었으니 그로서는 대견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이를 정동(貞洞)교회라고 불렀으나, 1890년 그러니까 교회가 창립된지 3년 뒤에 이르러 새문안 제일 교회라고 불렀다. 조선 초에 성곽을 축조할 때 서울의 서쪽에 돈의문, 즉 서대문을 세웠으나 교통이 불편하여 뒤에 이르러 오늘의 경향 신문사 부근으로 옳겼다. 그러므로 그 문을 신문(新聞), 즉 새문이라고 하였고 교회는 새문안에 있었으므로 그렇게 불렀다.
이 교회에서는 한국 개신교 역사상 처음으로 그해(1887) 크리스마스날에 성찬식이 거행되었다. 물론 당시 교회는 언더우드 집에 있었으므로 그곳에서 거행되었다. 새문안 교회는 날로 번창하여 창립 1년뒤에는 교인의 수가 50명으로 늘어났고, 그 중 11명이 또 세례를 받았다.
한국 교회는 출발에서부터 전도에 힘쓰는 교회로 알려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곳에 지교회(支敎會)가 설립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지방에 교회가 세워지지 않았다. 단지 '예배처소', 혹은 '전도소'등이 있었을 뿐이었다. 모두 걸어다니면서 전도하였다.
새문안 교회는 어머니 교회로서의 역할을 다하여 1910년대 7개소의 '예배 처소' 혹은 '전도소'를 갖고 있었다. 홍제동, 한강, 교북동, 김포, 행주, 동막, 파주등의 예배처가 그것이었다. 이런 것들은 뒤에 독립된 교회로 발전하였다.
한국에 온지 2년 뒤 언더우드는 한국의 실정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고 말도 약간 익히게 되자 북한 전도 순회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그것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선교사 '로스'등이 만주에서 번역하여 인쇄한 성서를 갖고 권서인이 되어 북항으로 들어온 한국인들이 기독교를 크게 전파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그 실상을 알아보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그때까지 어떤 선교사도 내륙지방에 전도 여행을 한 사람은 없었다. 한국인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어 위험이 따를 것이라 하여 누구나 감히 전도 여행을 할 생각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선교에 불타 있었고 견고한 신앙을 갖고 있던 언더우드는 어려움을 무릅쓰고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뜻밖에도 언더우드는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다. 어떤 때는 길을 잃고 망설이다가 한 농부집에 가서 물었다. 그 집의 농부는 매우 친절한 태도로 집에 들어와 무엇을 먹고 가라고 권함에 도리어 당황하기도 하였다. 언더우드는 한국 사람이 자기의 전도를 어떤 선입견 없이 잘 받아들인다는 확신을 얻었다.
언더우드의 북한 여행은 1887년부터 해마다 가게 되었다. 송도, 솔내, 평양, 강계, 그리고 배를 타고 압록강 강변 각 읍을 두루 방문하고 의주에 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코스였다. 가장 유망한 선교 활동이 의주에서 나타났다. 이 도시의 주변에 있는 마을과 군에서 정식으로 기독교 신자가 되겠다고 청하는 사람이 100명이나 모인바 있었다.
언더우드는 의주에 대해 각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기독교를 믿지 않는 사람은 물론이지만 믿는 사람중에도 불성실한 동기를 가진 사람도 많아 어떤 때는 행패를 부리기도 하였다. 가끔 범이 나다니는 산길을 밤중에 가야 될 때도 있었다. 또 기독교 선교사에게는 안전을 보장하여 주지 않겠다는 지방 관리를 만나기도 하였다.
2년뒤인 1891년 게일과 마펫목사가 북한과 만주지방 1400마일 전도 여행을 하면서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언더우드에 의해 씨가 뿌려졌기 때문이었다.
언더우드는 선교 방법으로 '네비우스'방법을 채택하였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는 스스로 전도하고(self-propagation), 스스로 유지하고(self-support), 스스로 다스린다(self-government)이다. 한국 교회들은 전도회를 조직하고 개척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사경회를 개최하고 병자를 심방하였다. 그리고 입교하기 위한 자격으로 적어도 새 신자 하나를 교회에 인도토록 하였다. 이 때문에 관서 지방에서 이룩한 선교 사업의 대부분은 한국인의 손으로 된 것이었다. 한국 교인들은 교회를 스스로 세우고 유지하였다. 한국인 신자들은 생활이 별로 넉넉치 못한 형편인데도 교회를 세웠다. 서양인의 눈에는 한국 교회가 보잘것없고 초라하게 보였을 지라도 한국의 고유한 건축양식으로 교회를 세웠으며 의식과 복식으로 교인들을 감동시키려 하지 않았다. 교역자 양성 문제 중 네비우스 방법에서 중요시한 것은 사경회였다. 그것은 성경에 대한 단순한 교육뿐만 아니라, 종교 생활을 심화하고 기독교적 봉사에 열중할 수 있도록 하는데 있었다. 언더우드도 사경회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1890년 초가을 자기집 사랑방에 '신학반'을 설치하였다. 교회의 최고 통치 기구는 한동안 선교부 연합 공의회가 담당하였다. 장로교회의 노회가 설치된 것은 1907년 9월이었다.
1896년 4월 서재필의 [독립신문] 간행은 한국 사회에 대단한 영향을 끼쳤다. 아펜젤러 목사가 1897년 2월 2일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라는 잡지를 창간하였다. 언더우드도 여기에 자극을 받아 그해 4월 1일 [그리스도 신문]을 창간하였다. 그러니까 전자는 감리교회에서 발간하는 신문이었고, 후자는 장로 교회에서 발행하는 신문이었다.신문은 일주일에 한번씩 간행하였다. 이 신문은 전체 8면으로 되어 있었고 기독교 교리를 소개하는데 큰 비중을 두고 있으면서도 농사와 관보 등에 대해서도 실었다. 또한 기독교 이외의 기사가 많아 정부에서 이 신문 467부를 구입하여 정부 10개 부처와 367군에 배포하였다고 한다. 이는 기독교에 대한 선의적인 태도라기보다 서양 문명을 일반 국민에게 알리려는 이른바 계몽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다. 이 신문은 1905년 7월 1일부터 장로교 감리교 연합으로 [그리스도 신문]이란 이름으로 발간되어 1907년 9월 27일까지 간행되었다. 1년간 언더우드가 사장으로 있었다. 그러나 그가 신병 치료차 '스위스'로 떠남에 사직하고 1907년 11월 13일에 [예수교 신보]로 개창되었다가 1910년 다시 [예수교 회보]로 바뀌었다. 그리고 또 다시 1915년 감리교의 [그리스도 회보]와 함께 [기독신보]로 바뀌었다.
선교 사업이 크게 진전되었으나 기독교인의 대부분은 늙은이거나 부녀자들이었다. 젊은이들을 교회로 끌어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1900년 언더우드는 아펜젤러 목사와 의논하여 한국에도 기독교 청년회를 설립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국제 위원회에 제출하였다. 곧 국제 위원회에서는 '질레트'총무를 1901년 9월에 파송했다. 질레트는 외국어 학교 학생들과 군인들에게 접촉을 하였다. 당시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거의가 하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들 신분이 낮고 무식한 젊은이들을 데리고 Y.M.C.A. 운동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1903년 10월 28일 드디어 기독교 청년회가 정식으로 조직되고 헌장을 채택하게 되었다.언더우드는 1916년 사망할 때까지 이사로 있으면서 한국 Y.M.C.A. 운동에 크게 공헌하였다.
외국 선교사, 그 중에서도 특히 미국 선교사들은 1905년에 체결된 보호조약이나 1910년에 체결된 합방 조약까지 한국인들과는 달리 일본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다. 만약 한국이 청국이나 러시아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면 무지몽매해져 어떻게 구제할 방도가 없으나 일본은 명치유신 이후 문명 개화를 표방하고 있어 그 지배하에 들어가면 한국인들이 행복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보호조약이나 합방 조약을 체결할 때에도 불편 중립주의를 내세워 방관하였다. 한걸음 더 나아가 일본의 정책을 적극 지지하는 이른바 친일파도 있었다.
그런데 선교사들의 중립적인 태도는 1910년 합방 뒤 점차로 바뀌었다. 특히, 일본이 '사내 총독 암살 음모 사건'이라는, 이른바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한국 기독교 지도자 100여명을 투옥하여 탄압하는 것을 보고 그 동안 지기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닫게 되었다. 일본측의 압력은 날로 드세어, 1913년 6월 '질레트'총무가 중국으로 추방되어 떠나게 되고 이어 한국 Y.M.C.A.는 일본 Y.M.C.A.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언더우드는 건강이 악화되어 요양차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1911년 9월 '예수교 장로교 조선 총회'가 조직되고 총회장에 언더우드, 부회장에 길선주가 각각 선출되었다. 총회 창립을 기념하여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세 사람을 선교사로 중국 산동성 래양현에 파견하였다. 또한 1915년 언더우드 선교 30주년을 기념하여 충청도 영동에 초가집이나마 교회가 세워졌다.
선교사들에게 많은 제재가 가해졌지만 언더우드는 이에 개의치 않고 선교 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1915년 3월 5일 미국 북장로교, 감리교, 캐나다장로교 등 각 선교부와의 연합으로 서울 종로에 있는 기독교 청년회 회관에서 60여명의 학생으로 '경신학교 대학부'라는 이름의 대학을 세우게 되었다. 총독부에서는 신규칙을 공포하면서 성경을 가르치거나 기도회를 가져서는 안된다고 하였으나 언더우드는 이전의 방식대로 성경도 가르치고 기도회도 열었다. 개교 당시 언더우드는 교장에 취임하였으나 아직 총독부로부터 학교 설립 허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한국인이 고등교육을 받고 높은 지식을 갖는 것을 바라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는 대학령을 두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전문학교령에 의해 연희 전문학교가 되었다. 연희 대학교와 지금의 연세 대학교의 전신이 된다.
연희 전문학교는 1918년 4월 '차원관(한국동란때 없어짐)'이란 목조 2층 건물을 지어 Y.M.C.A.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일본의 교육령에 의하면 교육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누구나 일본어를 익혀야 했다. 그런데 언더우드는 서울에 대학을 세우기는 했으나 일본어를 하지 못했던 것이므로 예순 가까이된 나이에도 불구하고 1916년 1월초 동경에 건너가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동시에 일본 기독교계 지도자들과도 교제를 넓혔다. 그러나 이런 강행군 속에서 그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었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한국을 등지고 미국으로 향했다. 슬프게도 한국을 보는 마지막 순간인지도 모르고 떠나야 했다. 미국에 돌아가자 한동안 건강이 회복되기도 하였으나 7,8월에 이르러 열이 나기 시작하면서 지탱하기 힘들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애틀랜틱 시로 옮겨 간호를 했으나 1916년 10월 12일 오후 3시가 조금 지나 한국에서 그렇게도 많은 일을 했던 큰 별이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의 건강은 육체적인 병으로 크게 악화되었으나 고등교육 기관,즉 연희 전문학교 설치 문제로 동교 선교사들과의 의견 마찰로 몹시나 고민을 하였던, 이른바 정신적인 것도 크게 작용하였다. 그는 운명할 때까지 한국을 매우 사랑하였다. 병상곁에 서기를 앉히고 한국과의 연락을 지켜보았다. 그의 죽음은 [뉴욕타임즈] 9월 16일자와 [뉴욕헤랄드] 9월 18일자에 실렸다. 그의 유해는 아버지와 형이 묻혀있는 '그로브 교회'소속 묘지에 안장되었다. 1927년 그가 최초로 세운 새문안 교회에 기념비를 세우고 다음해 4월 24일 연희 전문학교 교정에는 언더우드의 동상이 세워졌다. 그러나 일제 말기 일본인들이 구리로 되어 있는 이 동상을 갖고 대포알을 만든다, 총알을 만든다 하고 앗아간 바 있어 다시 해방 이후 1948년 10월 16일 두번째로 동상을 세웠다. 그러나 이 동상도 한국 동란이 발발하자 곧 공산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한편 언더우드에게 내린 훈장을 살펴보면, 일찍이 1906년 고종 황제가 태극 훈장을 내려 그의 활동을 기린바 있고, 1963년 8월 15일 광복 18주년을 맞이하여 대한민국 정부에서 다시 대통령상을 내려 기렸다.
1859년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아버지 '죤'과 어머니'엘리자벧'사이의 6남매 중 넷째로 출생
1865년
생모 별세
1868년
69년까지 프랑스에 유학
1872년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주 져지 시 헤스브르크 학원에서 개인교수로부터 서양고전을 배움
1877년
9월 뉴욕 대학에 입학
1879년
아버지 별세
1881년
6월 위 대학졸업 9월 뉴저지 주 뉴브런즈윅 시에 있는 화란계 개혁 신학교에 입학
1884년
6월 위 신학교 졸업. 동시에 뉴욕대학에서 석사학위 취득. 목사로 안수받음
7월 28일 미국 장로교 선교 본부에서 한국선교사로 임명받음
12월 16일 샌프란시스코를 출발. 일본을 거쳐
1885년
4월 5일 오후 3시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
1885년
4월 10일부터 제중원에서 근무. 뒤에 제중원 의학교에서 물리 화학을 강의
1886년
2월 고아원 설립. 이 고아원은 뒤에 야소교학당, 경신학교로 발전함
7월 16일 노도사에게 세례를 줌
1887년
9월 정동교회 설립. 뒤에 새문안교회로 발전.
11월 솔내, 평양, 의주 등지 순회전도. 성경번역위원회 조직
1888년
조선선교서회 조직
1889년
4월 [한국어문법], [한영사전]간행
1890년
여름 네비우스방법 채택. 9월 아들 원한경 낳음
1891년
1년간 안식년으로 미국감. 6월 뉴욕대학에서 명예신학박사 학위 받음
1894년
찬송가 간행
1897년
4월 1일 [그리스도 신문]창간
1901년
5월 2차 안식년으로 유럽과 미국 방문
1903년
10월 횡성 기독교 청년회 조직
1904년
조선교육협회 회장
1905년
9월 재한 복음주의 선교부 통합 공의회 의장. 선교구역 확정
1906년
7월 요양차 유럽과 미국 여행
1907년
3월 15일 금촌교회 개척
1908년
[한국개신교 수용사] 간행
1909년
조선 장로교 노회 회장
1910년
[동아세아의 종교]간행. 1910년부터 2년간 경신학교 교장
1911년
6월 교육조사국 창설
1912년
6월 뉴욕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 받음
9월 조선장로교 예수회 회장. 가을 피어슨 성경학원 설립
1915년
4월 15일 서울 중앙 기독교 청년 회관에서 경신학교 대학부를 세움. 교장 취임 이 대학부는 1917년 4월 7일에 연희 전문학교로 인가가 나오다
1916년
4월 요양차 미국에 가다
10월 12일 뉴저지 주 애틀랜틱 시에서 별세